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이영기 변호사(추모연대 감사)
1979. 10. 26. 박정희 유신정권이 붕괴되자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의 요구가 활발하게 제기되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 1980. 4. 21.부터 4. 24.에 걸쳐 강원도 사북읍에서 (주)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소속 탄광노동자와 주민 5천여 명이 “어용노조의 퇴진”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사북일대를 점거하는 ‘사북항쟁’이 발생하였다.
사북항쟁은 4일간의 농성 후 노사정 대표 사이에 협상을 통해 11개 항의 합의문을 작성하고 일단락되었으나, 1980. 5. 6.부터 6. 17.까지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은 탄광노동자 200여 명을 영장 없이 불법으로 구금 수사하면서 고춧가루 물고문, 통닭구이 등 가혹한 고문을 행하였고, 계엄군법회의는 그 중 31명을 계엄포고령 위반 등으로 처벌하였다.
사북항쟁은 이후 20여년간 사건의 진상이 왜곡되거나 부분적으로만 전해지다가 2000년경부터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기 시작하여, 2005. 8. 8.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에 따라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고, 2008. 4. 8.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사북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광범한 자료를 조사하고 90명에 대한 직접 진술을 청취하였으며 광부와 주민 149명 및 군인 85명에 대한 우편 질문지 조사, 현지 주민들을 상대로 한 현지 조사 등을 실시하여 사북항쟁의 진실규명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사북항쟁의 중심에 있던 이원갑, 신경 두 사람은 2010. 3. 계엄군법회의 판결의 처벌 근거가 된 증거들이 고문 등에 의하여 조작된 것으로서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하였고, 동 법원은 2015. 2. 6. 두 사람에 대하여 무죄판결을 선고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2015. 6. 22. 가족들과 함께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하였는데, 법원은 가족들의 위자료 청구는 일부 인용하였으나 이원갑, 신경 두 사람에 대해서는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생활지원금을 받아 국가와 재판상화해가 성립되었다는 이유로 위자료 청구를 기각하였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는 황당한 결과가 발생한 것이었다.
한편 헌법재판소는 2018. 8. 30. ‘구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제18조 제2항의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입은 피해 중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손해에 관한 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는 일부위헌 결정을 하였다. 즉 민주화보상금을 받았다 하더라도 위자료 부분에 대해서는 재판상화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결정이었다. 이에 두 사람은 2018. 9. 27. 다시 법원에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를 구하는 재심의 소를 제기하였고, 서울고등법원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두 사람의 재심청구를 인용하여 국가에 대하여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국가는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헌법재판소의 일부위헌 결정을 한정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헌법재판소의 위 결정은 법원을 기속하지 않는다는 황당한 논리로 다시 대법원에 상고를 하였다. 촛불의 힘으로 탄생한 정권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행태가 버젓이 벌어진 것이다.
다행히 대법원은 2020. 10. 29.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의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한 재심 사건에서,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생활지원금을 받아 재판상화해가 성립되었다고 하더라도 위자료는 위 재판상화해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별도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하여 재심청구를 인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북항쟁 당시 불법구금을 당해 모진 고문을 받고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한 두 사람에 대한 재심사건은 아직까지 대법원에서 잠자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로 사북항쟁은 40주년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와 재심 재판을 통해 사북항쟁의 진실은 이미 상당부분 밝혀졌다. 그런데도 국가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아무런 반성도 없이 여전히 권력의 횡포를 저지르고 있고, 법원은 강건너 불구경 식으로 시간을 지연시키고 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했다. 때를 놓치면 반성해도 소용없고 후회해도 이미 늦을 수 있다. 이제라도 국가는 석고대죄의 자세로 상고를 취하해야 하고, 대법원은 하루라도 빨리 사북항쟁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판결을 선고하기 바란다.
▲ 2018년 '제주무장대기행'에서, 왼쪽부터 이영기 감사, 임성종 공동의장, 김학규 학술교육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