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19일 진실화해위가 입주한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빌딩 앞에서 열린 추모연대의 의문사 진상규명 촉구 집회에서 이형숙 진상규명특위 부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지난해 12월19일 진실화해위가 입주한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빌딩 앞에서 열린 추모연대의 의문사 진상규명 촉구 집회에서 이형숙 진상규명특위 부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이형숙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추모연대) 진상규명특위 부위원장은 답이 없는 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상규명, 진상규명, 진상규명을 아무리 목놓아 외쳐도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답을 찾기 위한 구체적인 경로와 대안을 제시하며 요구해도, 역시 메아리는 없다. 피해자들은 모두 죽어서 말이 없고, 남은 사람들은 높은 벽과 싸운다. 그럼에도 이형숙 부위원장은 싸우려고 한다.

그가 붙들고 있는 화두는 ‘의문사 진상규명’이다. 그 의문사는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를 아우른다. 특히 1980년대 수많은 대학생이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경찰·보안사(현 방첩사)·안기부(현 국정원)의 수사를 받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현재 추모연대는 22명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의 죽음은 각각 2000년과 2005년 출범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 다뤘으나 상당수가 진실규명 불능 결정을 받았다. 이형숙 부위원장은 이들 죽음과 관계된 자료와 참고인을 찾아내 더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9월부터 한 주도 빠짐없이 월·수·금요일 진실화해위 앞에서, 화요일에는 경찰청 앞에서 각각 신속한 조사와 자료공개를 요구하며 1인시위를 했던 이유다.

이형숙 부위원장은 1993년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시작으로 1995년부터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2009년 1월 용산 재개발 보상대책에 항의하던 철거민들이 경찰과 대치 중에 사망한 사건(용산 참사) 때는 용산참사 대책위로 파견을 가 유가족들과 영안실에서 1년간 지냈다. 2003년부터 추모연대로 옮겼는데 2015~2020년에는 모든 활동을 접고 성공회대 사회학과에서 ‘한국군의 의문사 진실 부인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한 박사 논문을 썼다. 1984년 4월 화천 7사단 GOP(일반 전초)에서 발생한 고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이 어떻게 뒤집혔는지를 분석한 논문이다. 이후엔 1년간 부마항쟁 진상규명·보상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추모연대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세상을 떠난 700여명을 추모하기 위한 연대체다. 현재 200여개 단체가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이형숙 부위원장은 2024년에도 진실화해위를 주요전선으로 삼아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나가겠다고 말했다. 15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이 부위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경찰·방첩사·국정원에 있는 결정적 자료들

- 추모연대는 ‘열사’들을 대리하는 곳이네요.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열사’라는 말이 생소하겠지만 국가폭력이나 사회운동 과정에서 세상을 떠난 분들을 ‘열사’라고 칭하고 있어요. 전태일·박종철·이한열 뒤에 붙는 이름이잖아요. 그런 분들이 700명이나 되는데 그 뜻을 잇는 사업을 하고 있어요. 핵심 현안이 민주유공자법(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안) 추진이고요. 또 한가지가 ‘의문사 진상규명 및 폭압기구 대응사업’입니다. 폭압기구라는 말도 생경할 텐데, 국가폭력으로 국민들을 억압했던 기구라고 할 수 있겠죠. 경찰·방첩사·국정원입니다.”

- 경찰·방첩사·국정원 세 기관에서 자료를 받아내는 게 결정적이라는 말씀이죠?

“맞아요. 의문사는 피해자가 모두 고인이어서 진술 조사가 불가능하잖아요. 결국 이 행위가 일어난 가해 기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어요. 이 기관들의 투명성에 의해 진상조사가 좀 더 나아질 수 있고요. 끝내 자료를 안 내놓는다면 저희가 끊임없이 이 문제를 떠들어서 당시 그 기관에서 일했던 분들이 입을 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해요.”

그 많던 기관별 과거사위원회, 의문사는 포함 안돼

- 추모연대에서 요구하는 의문사 진상규명 대상이 22명입니다. 2000년에 유족들이 요구한 대상자는 80여명이었던 걸로 알아요.

“1987년 6월항쟁 이후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한 의문사 대상자가 40여명이었어요. 2000년 대통령 직속기구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을 때는 두 배 늘어 80여명이었고요. 이제 22명이 남았습니다.”

- 2000년대에 국방부·국정원·경찰이 각각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의문사는 포함하지 않았나요?

“경찰청이나 국방부·국정원 등 자체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는 12·12사건과 강제징집 등 각 기관이 스스로 거듭난다는 취지 아래 기존에 많이 드러난 사건들 중심으로 조사했어요. 이런 기구들 때문에 의문사가 많이 조사된 줄 알지만 전혀 아닙니다.”

15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나 이야기하고 있는 이형숙 추모연대 진상규명특위 부위원장. 고경태 기자
15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나 이야기하고 있는 이형숙 추모연대 진상규명특위 부위원장. 고경태 기자

진실화해위에 요구해도 계속 젖혀지는 느낌

- 어쨌든 지금 진실화해위에서 22건 대부분에 대해서 조사를 개시했어요.

“22명 중 19명에 대해 조사를 개시하기는 했죠. 이미 2000년대 의문사진상규명위에서 진실규명 불능 결정을 내리거나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사망했다고 결정했던 대상자들인데, 부족한 점이 많아요. 죽음까지 이르게 된 실체적 과정을 밝히지는 못했으니까요. 나머지 3명 중 2명은 조사개시 전에 자료조사 단계인 사전조사 개시로 결정이 났어요. 우종원(1985년 10월 열차에서 투신, 당시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4학년)과 노진수(1982년 5월 실종, 당시 서울대 법학과 1학년)입니다. 마지막 1명 김성수(1986년 6월 송도 앞바다에서 시멘트 덩이를 매단채 변사체로 발견, 당시 서울대 지리학과 1학년)는 아예 각하를 했죠. 우종원·노진수는 의문사위에서 진실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고, 김성수의 경우는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인정했었어요.”

- 진실화해위에서 1명만 각하되고 21명은 조사하고 있는 셈인데, 어떻게 되고 있나요?

“말로는 계속 조사중이라고 하는데, 조사를 안 하는 느낌이에요. 이건 수사에 준하는 조사일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피해자 진술은 받을 수 없고, 그러면 참고인 조사를 해야 하는데 누가 참고인인지를 모르잖아요. 이건 경찰·방첩사·국정원에서 반드시 자료를 받아야 하는 건데 쉽지는 않겠죠. 우리는 계속 빠른 진상규명 조사를 요구하는데, 그냥 젖혀지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슬픈 일이에요.”

1989년 5월 민가협 등 재야단체회원 50여명은 18일 '이철규 열사 사인규명'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법원 청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5월 민가협 등 재야단체회원 50여명은 18일 '이철규 열사 사인규명'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법원 청사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청문회 조사 요구하고 조사 포인트 적시

- 진실화해위에 청문회 조사 등을 요구하고 있던데요.

“진실화해위 기본법에 ‘위원회는 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증인·감정인·참고인으로부터 증언·감정·진술을 청취하고 증거를 채택하기 위하여 위원회의 의결로 청문회를 실시할 수 있다’(24조)는 조항이 있어요. 거기에 따라 청문회 조사를 요구하고 있는데 아무런 답이 없어요. 청문회 조사를 하려면 가해자 또는 주요 참고인이 드러난 사건이어야 하는데, 결국 진실화해위 쪽과 교섭하다 보면 조정이 될 수 있다고 보고요. 가령 이철규(1989년 5월10일 광주의 저수지에서 변사체로 발견, 당시 조선대 ‘민주조선’ 편집장) 의문사 사건 같은 경우는 이철규를 검거하기 위해 쫓아갔던 광주 북부서 경찰 5명, 안기부 광주지부 수사과 요원 등 대상자를 특정할 수 있어요.

또 각 사건에 대해서 조사할 핵심 포인트가 무엇인지를 정리해서 제출한 상태예요. 가령 김용권 사건의 경우 당시 6군단 수사관 이OO 중사 진술조서와 보안사의 208보안부대 출장 기록, 수도통합병원서 대구병원 후송 이후 대구병원 담당의 및 간호장교 윤OO, 이OO, 한OO, 곽OO, 박OO 등 진술조서를 받으라거나 수도통합병원에서 대구병원 이송 전 진료한 2주간의 사라진 진료기록을 확인하라는 식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경찰청 보안문서실에 김두황 자료 요구

- 경찰청 앞에서도 자료공개 시위를 계속 해왔잖아요.

“경찰청 보안문서실에 시국 관련 사건에 대한 조사자료들이 있어요. 지난해 11월6일 윤희근 경찰청장이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 자리에서 민주당 김의겸 의원실 통해서 보안문서실의 존재를 확인해주었어요. 그래서 김의겸 의원실을 통해 경찰청 보안문서실에 있을 수 있는 김두황(강제징집 뒤 1983년 6월 매복지에서 총상 입은 변사체로 발견, 당시 고려대생) 사건 자료와 함께 다른 의문사 자료 목록을 내놓으라고 했어요. 김두황은 중요한 학생운동권 팸플릿을 생산·유포했다는 혐의로 경찰과 보안사의 녹화공작(강압적 순화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당연히 경찰청에 자료가 있을 거예요.

진실화해위 조사관들도 경찰청 보안문서실에서 자료를 찾을 수 있어요. 문제는 일반적인 인권침해와 관계된 문서는 나오는데 의문사 문서는 안 나와요. 경찰에서 의문사는 별도로 관리하는 느낌입니다. 진실화해위 입장에서도 경찰청이 협조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호할 거예요. 물론 지금 진실화해위 군 의문사 담당 조사관들이 여기까지 가서 조사하는지는 모르겠어요. 안 하는 느낌이라 저희가 나선 측면도 있어요. 계속 압박하는 방법밖에는 없어요.”

지난해 11월6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 앞에서 추모연대 주최로 열린 경찰청 의문사 자료 공개 촉구 집회에서 이형숙 진상규명특위 부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이형숙 제공
지난해 11월6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 앞에서 추모연대 주최로 열린 경찰청 의문사 자료 공개 촉구 집회에서 이형숙 진상규명특위 부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이형숙 제공

침묵해온 자들에게 입을 열 기회를

- 방첩사와 국정원은요?

“방첩사는 그나마 진실화해위 자료 요청에 협조적인 걸로 알아요. 물론 의문사 관련 자료는 절대 주지 않고 있죠. 국정원이 제일 문제예요. 경찰청이나 방첩사는 진실화해위를 비롯한 과거사 조사기관의 조사관이 직접 방문해 자료를 찾을 수 있게 해주는데, 국정원은 공문으로 키워드만 보내라고 해요. 국정원에서 ‘있다. 없다’ 답변하고 자료를 보내준다는데, 진실화해위에서도 국정원 자료는 정말 받기 어려워요. 저희는 어느 기관이든 자료가 어딘가에 남아있을 거라고 봐요. 자료는 각 기관의 자산이잖아요. 언제라도 활용 가치가 있으니까 버릴 이유가 없죠. 폐기한다면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목록을 남겨야 할 텐데, 기관의 책임자들이 하나도 안 남기고 폐기하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지는 않을 거예요.”

- 의문사 진상규명 요구는 아무리 해도 뭔가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은 느낌 같은 게 있어요. ‘인제 와서 되겠어?’라고 비관적으로 보기도 하고요.

“그렇죠. 갑갑해요.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생각하고, 그 끈을 절대 놓지 않을 거예요. 죽음을 목격하고 은폐하거나 조작하고 부인해온 가해자들이 다들 어디 계신지 모르지만 나이가 드셨을 텐데 죽기 전에 양심 고백을 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들이 침묵을 끝내고 입을 열 기회를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여기서 끈을 놓으면 가해자들이 얼마나 홀가분하겠어요.(웃음) 발 뻗고 자도록 할 수는 없어요. 또 범죄를 저질렀던 기구들이 국민이나 인권적인 문제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도록 해야 해요. 제도를 개선하는 효과가 있고요. 국정원이 대공수사를 못하는 방향으로 법이 개정되는 것처럼요.”

1991년 5월7일 오후 백골단(사복경찰 체포조)이 콘크리트벽을 뚫고 안양병원 영안실에 난입해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었던 박창수씨의 주검을 탈취하려 하자 박창수씨의 유족들이 격렬히 저항하고 있다. 박창수씨도 추모연대가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22명의 대상자 중 하나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1년 5월7일 오후 백골단(사복경찰 체포조)이 콘크리트벽을 뚫고 안양병원 영안실에 난입해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었던 박창수씨의 주검을 탈취하려 하자 박창수씨의 유족들이 격렬히 저항하고 있다. 박창수씨도 추모연대가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22명의 대상자 중 하나다. 한겨레 자료사진

의문사 진상규명은 소설이 사실 되는 과정

- 의문의 죽음에 대해 다른 가설을 제시하면, 소설 쓴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죠.

“그 소설이 시간이 가면 사실이 되는 과정, 그게 바로 의문사 진상규명이에요. 처음에 정보·수사기관이 발표한 내용이야말로 소설이죠. 1973년 10월에 일어난 서울대 최종길 교수 사건 같은 경우 중앙정보부 7층에서 투신자살했다고 했잖아요. 나중에 간첩조작과 고문치사 사실이 드러났어요. 대법원도 인정했고요. 허원근 일병도 자살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자살하는 사람의 몸에 총상이 여러 군데 있을 수 있나요? 20년, 30년 뒤에 밝혀지는 경우가 허다해요. 박종철 사건을 생각해보세요. 명백하게 물고문으로 죽여놓고 그렇지 않은 거로 조작하려고 했잖아요. 의사나 주변에서 목격한 분들이 폭로하지 않았으면 박종철도 저희가 시위 때마다 들고 있는 손팻말에 이름이 올랐을지 몰라요. 박종철 의문사 사건 진상을 규명하라고 말이죠. 독재시대 공권력을 행사한 자들이 그동안 교묘하게 증거를 인멸해왔고, 아직 꼬리를 잡히지 않았을 뿐이죠. 다시 말하지만, 그분들 발 뻗고 자게 할 수 없어요.”

- 박종철이 죽고 한 달 뒤 김용권이 죽는데 두 사람의 관련성이 있나요?

“김용권 의문사 사건은 군대판 박종철 사건이에요. 김용권은 1985년 카투사로 입대해 미8군 2공병여단에서 근무했어요. 1987년 2월20일 내무반 침대 난간에 목을 맨 채로 발견됩니다. 서울대 경영학과 83학번으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인데, 수시로 보안부대에 끌려가 구타·고문·회유를 당하면서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았다고 해요. 1986년 가을 경찰의 서울대생 수사 과정에서 박종철과 김용권의 이름이 동시에 드러나고 이후 각각 경찰과 보안사에 연행된 것으로 알아요.”

1985~1988년에 특히 많이 죽은 이유

- 1985~1988년에 많이 죽었어요.

“서울대생만 해도 박종철 빼고도 5명이 실종되거나 의문의 죽임을 당해요. 1985년 우종원, 1986년 김성수, 1987년 김용권 최우혁, 1988년 안치웅의 순서로요. 우종원·김성수·김용권의 죽음은 앞에서 언급을 했었죠. 나머지 2명 중 최우혁은 1987년 9월8일 선도공작 과정에서 사망하고, 안치웅은 1988년 5월26일 집에서 외출한 뒤 실종됩니다. 당시 보안사가 서울대생 378명에 대한 카드를 만들어 수사를 하거든요. 저는 이게 1987년에 물러나기로 한 전두환의 재집권을 위한 모종의 계획과 관련이 있었다고 봐요. ‘서울의 봄’ 연장을 꿈꾼 거지요. 보안사 감찰실장을 지낸 한용원 대령은 1993년 ‘한국의 군부정치’라는 책에서 1985년 전두환의 재집권에 대비해 보안사가 정치개입을 했던 사실을 밝히고 있어요. 실제 1986년 국정연설과 이후 여·야 정당 대표 청와대 초치를 통해 전두환은 ‘개헌문제를 89년에 가서 논의하는 것이 순서’라는 망발을 하며 군부정권을 연장하고자 했습니다. 이로 인해 정권 연장에 가장 큰 걸림돌인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은 공안기관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의문사가 발생했다고 보고 있어요”

진실화해위 조사권한 확장해야

- 결국 이 문제를 조사할 기구는 진실화해위밖에 없잖아요. 지금의 진실화해위 구조는 한계가 많다고 보시는 거죠?

“위원장을 제외한 여야 추천 구성이 4대4가 되니까 정쟁이나 이념대립처럼 가는 흐름이 있어요. 굉장히 위험스럽죠. 아직도 진실 규명되지 않은 인권침해 사건이 2000건 가까이 돼요. 한국전쟁기 민간인 사건은 8000건이 넘고요.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계속 끌고 가야죠. 그리고 변화를 요구해야 하고요. 지금보다 조사권한이 확장돼야 합니다. 검사를 통한 영장 의뢰뿐 아니라 통신사실 조회나 계좌추적도 가능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뭐 지금은 법에 있는 청문회 개최도 하지 못하고 있죠. 오는 25일 오후 1시에 국회 본청 앞에서 한국전쟁 유족분들, 국회의원들과 함께 기자회견 계획하고 있습니다. 진실화해위 1년 기간연장과 별도로 진실화해위 기본법(과거사법) 개정안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돼 있잖아요. 법을 바꿔서 진실화해위 기간연장을 더 하든 상시기구로 만들든 해야죠. 확실하게 과거청산을 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의문사 진상규명의 환경을 만들어주는 길이고요.”

맨 윗줄 왼쪽부터 박태순, 최우혁, 김용권, 이철규, 우종원. 가운데 줄 왼쪽부터 김성수, 김두황, 이윤성, 이덕인, 정성희. 아래 줄 왼쪽부터 정경식, 이내창, 문승필, 한희철, 한영현. 한겨레 자료사진
맨 윗줄 왼쪽부터 박태순, 최우혁, 김용권, 이철규, 우종원. 가운데 줄 왼쪽부터 김성수, 김두황, 이윤성, 이덕인, 정성희. 아래 줄 왼쪽부터 정경식, 이내창, 문승필, 한희철, 한영현. 한겨레 자료사진

진상규명 요구하지 않는 삶 상상할 수 없어

이형숙 부위원장은 2022년 추모연대에 복귀하고 보니 활동에 참여하는 유가족의 세대가 교체돼 있었다고 했다. 부모들이 세상을 많이 떠났고, 형제자매와 친구들이 의문사 당시 부모들의 나이가 되었다. 젊은 시절 사회생활하느라 바빴던 이들이 환갑의 나이에 이르러 다시 진상규명을 외치는 거리의 현장으로 돌아왔다. 이형숙 부위원장은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이상, 친구나 형제자매의 죽음으로 생긴 트라우마는 치유될 수 없다”고 했다. 본인 역시 허원근 일병 의문사가 어떻게 은폐와 조작과 회피의 과정을 거치는지에 관한 박사 논문을 쓰면서 그 트라우마에서 더더욱 놓여날 수 없다고 했다. 이제 진상규명을 요구하지 않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추모연대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이들의 사연을 듣다 보면 끝이 없다. 이형숙 부위원장은 서너 사람의 의문사 쟁점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이곳에 다 담을 수 없어 아쉽다. 한 사람 한 사람 각각의 진상규명을 위해 달려온 과정이 책 한권이다.

이진래

한희철

정성희

이윤성

김두황

한영현

김용권

최우혁

김창수

장준하

정경식

안치웅

이철규

이내창

박창수

박태순

문승필

권두영

이덕인

우종원

김성수

노진수

이형숙 부위원장은 2024년에도 인권운동의 전선에서 이들 22명의 이름을 부를 계획이다. 죽음에 관한 진실을 아는 이들이 발 뻗고 잘 수 없도록.

고경태 기자 k21@hani.co.kr